조선 개항장 연안서 처음 등장
선박을 내항으로 유도 도표 역할
조수간만 차이 큰 제물포에 필요성

사도 남측·해망대 2곳 최적지 선정
각각 2기씩 목제 도표 완성
자체적 위치선정·유지보수 큰 의미

인천해관, 1887년 기존 도표 진일보
암초 위치·수심 확인 위해 '비컨' 설치
소월미도 첫 성과…높이 5.4m 달해

자동차 등 교통수단과 보행자가 상호 도로를 안전하게 이용하기 위해 교통표지가 필수적이라는데에 이견은 없다. 물론 선을 그을 수 없는 하늘과 바닷길을 운항하는 비행기, 선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인류는 고대로부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광대한 바다에서 항해의 성공을 높이려 끊임없이 항법을 연구해왔다. 그들은 날씨와 해류의 흐름, 암초의 위치와 수심을 알아냈고 별자리 변화 등 관찰과 반복된 경험을 통해 얻은 정보를 축적했다. 그리고 위대한 발명, 즉 인공 구조물을 만들어 냈는데 이것이 원양항해의 안전을 증진시키는데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다. 바로 '등대'이다. GPS가 없는 그 시대, 칠흑같이 어두운 밤, 오로지 별과 달만을 보며 뱃길을 찾던 항해자들에게 일대 혁신을 가져다주었다. 인간의 힘으로 망망대해에 있는 선박들에 정보를 제공한다는 이 구상은 향후 신속히 세상을 연결하고 국제무역을 촉진시킨 긍정적 역할 이외에 제국주의의 확장에도 기여했다는 부정적 평가도 동시에 받고 있다.

▲ [1884년 인천항과 도표] 인천항이 촬영된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사진이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두 곳은 해망대 위 인천해관에서 설치한 삼각도표 2개가 들어섰다. 그 옆에는 해관원 라포트와 슐츠가 각각 지은 주택이다. /자료 출처=김성수

 

개항후의 조선사정

구한말 제물포가 열린 1883년 1월 1일은 조선이 서방 세계와 교역을 시작한 역사적인 날이었다. 비록 항구는 개방되었으나 서해안과 남해안의 항로는 아직 제대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안전항해를 보장할 수 없었다.

개항 초기 조선은 항로를 직접 조사할 인력도 재정도 없는 나라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측량에 나선 두 나라가 영국과 일본이다.

영국은 아예 전문 측량선 비어호(飛魚號 Flying Fish)를 조선 수역에 보내 항로를 조사했고, 일본 역시 수시로 해군의 군함 등을 보내 연안을 측량하는데 열의를 보였다. 그 결과는 해도를 작성하거나 기존의 오류를 수정하는 데 수시로 반영되었다. 상품에 대해 무관세를 관철했던 일본이었지만 상선이 개항장에 입항할 때는 '선세(船稅)'를 자발적으로 납부하겠다고 나섰다. 자신들이 이용할 항만을 수축하고 유지 관리하는데 드는 비용을 수익자가 부담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2년이 지난 시점에서 조선대표는 항로표지 용어를 처음으로 접했다. 부산 두모진판찰소 수세사건을 빌미로 벌어진 개항담판 테이블 위에서였다 일본대표는 자국에 설치된 '등대' 사진까지 준비해와 항로표지 설치를 주장하고 나섰다. 조선 측은 긍정적 태도를 보였지만 실제 항로표지의 건설로 이어지기까지는 4년이 더 필요했고 등대는 20년이나 지난 이후 우리 해역에 등장하게 된다.

▲ [제물포 항로표지] 인천내항의 항로를 표시한 해도로서 입항선박이 진입할 때 일직선으로 정렬해야할 도표 설치 위치가 해망대와 사도에 2개씩 정확히 표시되어 있다. /자료 출처=프랑스 국립도서관 

 

도표의 등장배경

항로표지의 대표격은 '등대'라 할 수 있지만 그 범주에는 도표(導標), 부표(浮標), 도등(導燈) 등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 이중 조선 개항장 연안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항로표지는 선박을 내항으로 유도하는 '도표'였다. 제작기간, 설치의 용이성, 비용 등을 고려해 볼 때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개항장 3곳 중 조수간만의 차이가 가장 심하고 수로마저도 좁았던 제물포는 설치가 시급한 곳이었다.

정확한 시기는 특정할 수 없으나 조선총세무사 묄렌도르프가 개항 직후 인천해관 초대세무사 스트리플링(A. B. Stripling)에게 문서를 보내 도표설치를 명했거나 항만운영의 책임자인 독일인 슐츠(F. W. Schulze)의 건의로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얼마 후에 사도(Station Island, 모래섬) 남측과 해망대(나중 영국영사관 터) 2곳이 최적지로 선정되어 각각 2기씩의 목제 도표가 완성되었다.

사도에 세운 것은 사각형, 해망대 위의 것은 삼각형으로 내항으로 진입하는 선박들은 이 표식과 선박을 일직선에 정렬하며 진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부산항도 한곳에 삼각형의 도표가 설치되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근대항로표지의 효시라 할 수 있는데 다른 나라의 도움 없이 해관 자체적으로 위치 선정부터 설치, 유지보수를 했다는 것에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 [별간7건] 협상장에 나온 일본대표는 요구사항을 7가지로 정리해 조선측으로 하여금 답변할 것을 요구했다. 특히 마지막에 부분은 이전에 없던 항로표식관련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자료 출처= 프랑스 국립도서관·김성수<br>
▲ [별간7건] 협상장에 나온 일본대표는 요구사항을 7가지로 정리해 조선측으로 하여금 답변할 것을 요구했다. 특히 마지막에 부분은 이전에 없던 항로표식관련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자료 출처=김성수

 

비컨의 설치

개항장에 접근할 때까지 존재하는 다양한 위험요소는 항해자가 알 수 있게끔 널리 알려야 할 필요가 있다. 현재 발견된 기록으로 볼 때 1885년 8월 12일, 인천해관 리선청 슐츠의 명의로 발령된 수로고시(Hydrographic Notice)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부산해관에서 발령된 항로고시보다 약 2년 앞선다.

이 고시는 슐츠가 서울주재 독일공사에게서 받은 정보를 바탕으로 만든 것이었다. 독일제국 순양함 '노틸러스'는 조선의 남해에 있는 소안항과 추자군도 사이의 한 바위를 확인했는데 이것은 이 바위를 잘 아는 조선인들이 도움을 주었다. 이것을 계기로 조선해관은 연안을 조사하고 발견되는 위험물, 항로표지 설치사실을 수시로 항로고시를 통해 각국 공사관, 언론에 알려 안전항해를 위해 진력했다.

인천해관은 기존 도표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항해자들이 암초의 위치를 알거나 수심을 확인할 수 있도록 '비컨'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1887년 10월, 북장자서와 남장자서, 백암에 비컨건설 계획을 총세무사에게 보고하고 승인을 받았다. 그 첫 성과가 소월미도 비컨이었다. 시멘트와 돌을 사용해 만든 이것은 높이가 5.4m에 달했고 표면은 식별이 쉽도록 흰색과 적색 페인트를 교차로 칠했는데 수심은 숫자로 표시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인천과 부산은 항로표지가 어느 정도 설치되었으나 등대 건설은 1901년 이후부터 인천해관 등대국에서 주도하게 된다.

/김성수 전 인천공항세관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