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관 안팎에 걸려 있는 노란 리본에는 한 글자씩 눌러 담은 그리움과 추모의 마음이 가득하다. “잊지 않겠다”는 다짐도 눈에 띄었다.
이곳에서 만난 전태호(47) 세월호일반인유가족협의회 위원장은 여느 때처럼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다.
10년 전 70세였던 아버지 전종현씨는 세월호 참사로 목숨을 잃었다.
강산도 변할 10년이 흘렀지만 태산 같은 그리움은 그대로다. 시간도 그를 달래지 못했다.
▲그날의 이야기
전종현씨는 세월호 참사 하루 전날인 2014년 4월15일 자전거 동호회원들과 뱃길에 올랐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전태호 위원장은 “자전거 타는 분들의 국토 대장정 마지막 코스는 제주도 올레길인데, 아버지도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기 위해 제주도로 가시려고 했던 것”이라며 “모두 다섯 분이 출발했는데 아버지를 포함해 4명이 참변을 당하셨다”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 어머니 전화를 받던 순간부터 전남 진도로 향하던 길까지 그날을 오롯이 기억하고 있었다.
전 위원장은 “일 때문에 당진에 있었는데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라며 “아버지께서 ‘쿵 소리가 났는데 배가 암초에 걸렸는가 싶다. 구조하러 온다고 했다. 큰 배라서 한 번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하셨다더라. 그리고 한 시간 만에 배가 넘어갔다”고 회상했다.
곧장 진도로 달려간 전 위원장은 가장 먼저 서망항을 찾았다가 이후 팽목항으로 향했다.
그는 “팽목항에 카페리선 한 대가 들어왔는데 이후 더는 입항하는 배가 없었다”라며 “현장은 아비규환이었다. 진도체육관에서 생존자 리스트를 봤지만 아버지 이름은 없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세월호 참사 이틀 뒤 뭍으로 올라왔다. 주검이 된 전씨는 참사 희생자가, 전 위원장은 일반인 희생자 유족이 됐다.
전 위원장은 여전히 부자가 쌓은 추억을 곱씹는다고 한다.
“아버지와 취미가 비슷해 주말이면 아버지 댁으로 갔어요. 함께 갔던 곳과 함께했던 걸 떠올리면 감정이 올라옵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잊히는 건 아니더라요.”
▲바뀐 것과 바뀌지 않은 것
그렇게 10년이 흐르고 우리 사회는 무엇이 바뀌었을까.
전 위원장은 “사회 전반적으로 안전불감증이 100% 해소는 안 됐지만 예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넘어갔던 게 지금은 개선된 부분도 많다”며 “선박 회사의 경우 짐을 실을 때 물동량 등을 계산해서 무게 중심을 맞추고 있고 신분증을 철저히 확인하는 등 안전 관리를 잘하더라”고 평가했다.
반면 여전히 국가 재난 관리 체계가 미흡하다는 지적도 내놨다.
그는 “어떤 사건만 터지면 ‘막을 수 있는 재난이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막아야 했던 게 아닌가”라며 “미국의 9·11 테러를 보면 대통령과 시장이 아니라 해당 지역 소방안전관리 책임자가 현장 지휘권을 갖고 발 빠르게 진두지휘를 했다. 우리나라는 윗사람에게 보고하는 걸 중요하게 여긴다. 여전히 재난 관리 체계가 미진한 부분”이라고 꼬집었다.
지난 10년은 치유보단 고통의 시간이 길었지만 기억과 연대는 그에게 위로를 안겼다.
특히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을 방문한 시민들로부터 위안을 얻고 있다고 한다.
전 위원장은 “방문객들이 ‘늦게 와서, 몰라서 죄송하다’고 이야기해주곤 하는데 그 자체가 제게 위안이 된다”고 말했다.
다시 봄이 왔다. 그는 우리에게 세월호를 잊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4월16일은 국민 안전의 날이기도 합니다. 안전 문화가 확산돼 안전한 나라가 됐으면 하고요. 특별한 날뿐 아니라 평상시에도 세월호를 계속 기억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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